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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회중시계 의미 윤봉길 의사 의거와 남겨진 유품

by todayis 2026. 1. 20.

백범 김구 회중시계는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와 함께 한국 독립운동사의 중요한 상징으로 남아 있는 유물입니다.

백범 김구 회중시계 의미 윤봉길 의사 의거와 남겨진 유품

김구의 유품 속 회중시계가 지닌 역사적 배경

1949년 6월 26일 김구는 서울 경교장에서 피살되며 생을 마감했습니다.

평생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그는 화려한 유산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피살 당시 입고 있던 옷과 사용하던 인장 등 소박한 유품들이 전부였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스스로를 평범한 백성이라는 뜻의 백범이라 불렀던 그의 삶의 태도와도 잘 맞닿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유품들 가운데 유독 눈길을 끄는 물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김구가 품에 지니고 있던 회중시계입니다.

외형만 보면 비교적 값비싼 물건으로 보였던 이 시계는 단순한 개인 소지품이 아니었습니다.

 

이 회중시계는 윤봉길 의사와 깊은 인연을 지닌 물건으로, 김구의 삶뿐 아니라 독립운동사의 중요한 장면을 함께 간직하고 있습니다.

현재 이 회중시계는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으며 그 의미가 계속해서 전해지고 있습니다. 

김구와 윤봉길의 만남 그리고 시계의 교환

윤봉길은 충청남도 예산 출신으로 농촌 계몽과 교육 활동에 힘쓰던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농민들에게 한글과 역사를 가르치며 농촌 부흥을 꿈꿨지만 일제의 감시가 점점 심해지자 국내 활동의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결국 윤봉길은 독립운동의 길을 선택하고 중국 상해로 망명하게 됩니다.

 

1931년 스물다섯 살이 된 윤봉길은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고 있던 김구를 만나게 됩니다.

당시 일본은 만주사변과 상해사변을 연이어 일으키며 중국 본토 침략을 본격화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은 훙커우 공원에서 전승기념축전을 열겠다고 공표했고 윤봉길은 이 자리에서 일본군 수뇌부를 겨냥한 의거를 결심합니다.

 

1932년 4월 29일 의거 당일 아침 김구는 윤봉길의 마지막 길을 위해 정성껏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윤봉길은 김구가 쓰던 낡은 회중시계를 보고 자신이 새로 구입한 시계와 바꾸자고 제안했습니다.

윤봉길의 시계는 당시 상당한 가격의 고급 회중시계였으며 김구의 시계보다 값이 높았습니다.

윤봉길은 “앞으로 한 시간밖에 필요 없다”며 시계를 건넸습니다.

독립운동과 함께 멈춘 회중시계의 의미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들에게 회중시계는 단순한 생활용품이 아니었습니다.

독립운동은 대부분 비밀리에 이루어졌으며 점조직 형태로 운영되었습니다.

정확한 시간 약속은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였고 회중시계는 필수품이었습니다.

 

윤봉길 역시 거사의 정확한 시점을 맞추기 위해 시계를 준비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의거 당일 그는 도시락 폭탄과 물통 폭탄을 준비해 행사장에 들어갔고 약속된 순간에 물통 폭탄을 단상으로 던졌습니다.

이후 그는 체포되었고 이 사건은 국내외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일본군 고위 장성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으며 국제 사회에도 회자되었습니다.

의거 이후 김구는 윤봉길이 남긴 회중시계를 평생 간직했습니다.

 

백범 김구 회중시계는 오늘날까지도 당시 두 독립운동가의 정신과 결의를 보여주는 상징적 유물로 남아 있습니다.